너 다 티 나, 바보야.
지금까지 나 좋다는 사람이 있었나, 묻는다면 당연히 있기야 있었다. 연애는 안 했다. 대뜸 들이댄다고 없던 내 마음이 생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백마 탄 왕자님을 찾는 것도 아니었다.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 연애는 굳이 필요없다던 안우연의 신조였다. 누가 물으면 그렇게 얘기했다. 난 느리고 확실한 사람이 좋아. 못 하는 게 하나 있다면 기다림에, 불확실한 확률을 살 운명인 우연에게는 참 안 어울리는 문장이었지만.
안쓰럽고 반가웠다. 옥상 가던 날 밤 네가 복도에서 대뜸 눈물을 보였을 때. 그런 너를 다시 한 번 안아주었던 날에는 풀지 못 한 숙제를 다 해낸 것 같았다. 너는 지금껏 내가 모르는 시간을 살아냈구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지만 여기까지 살아 우린 다시 만난 것이다. 우리의 삶은 평행 직선이라기보다는 곡선이니까, 때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접점이 있으니까. 한 번 다시 만났으니 두 번이 어렵겠어. 앞으로는 지금보다 덜 멀어지고 자주 만나기를. 그날 옥상에서 별 보면서 우연은 웃었다. 긴 시간의 오해와 함께 당신의 행복을 생각했다. 떠올려보면 그 행복에는 나도 함께였었나.
언제부턴가 네 뺨이 붉어지는 일이 잦았다. 토마토, 딸기, 빨간 신호등! 온 세상에 존재하는 붉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다 보면 그제서야 시선이 잠시 마주치곤 했다. 어쩌면 네가 날 '좋아하는' 마음은 내 예상과 조금 다른가. 거만한 예상을 한 것도 마음 속에서였을 뿐이니까 들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 ...그러면, 손 잡아줘.
- 응? 무섭다든가 하는 거야?
모르는 척하고 능청스레 딴 소리 좀 해 봐도, 말 못 해 머뭇거리는 얼굴을 보면 그냥 손 잡아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음이 약해서 문제지. 그게 진짜 문제인가? 나는 마음이 약한 게 맞나? 지금껏 데이트하자느니 연락처를 달라느니 하는 사람들한테 휘둘렸던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옛 인연이라 그런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잡은 손을 가만 흔들고 있으면 닿은 살이 따뜻했다. 빤히 쳐다보면 시선을 피한다.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러다가 사랑에 빠졌다. 왜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쑥스러워 말을 고르고 고르는 네가 좋았다. 뺨은 붉고 목소리는 떨려서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소년 같던 네 모습이 좋다. 해변을 닮은 네 눈동자와,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가끔 웃어주는 얼굴도 마음에 든다. 확률의 싸움, 확실한 것 하나 없는 세계에서 확률도 의심도 무의미하게 만들어주는 감정. 굳이 필요없는 것도 가끔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버린다.
세계는 우연의 연속으로 만들어진다던 사람. 운명은 바꿀 수 없으니 두렵다는 사람. 그러니 여전히 나는 네가 내 우연이었으면 좋겠다. 반복되는 우연으로 이어지는 길, 무수히 많은 접점으로 수놓인 삶이었으면 좋겠다. 영원하지 않다면 수없이 만나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끝없이 바꿔내면 되는 거니까.
- 너 다 티 나, 바보야.
내 앞에서 유난히 많이 웃던 것도, 유치원생 때 한 뽀뽀 따위에 질투하던 것도, 얼굴 빨개지는 것도, 거짓말할 때는 머리카락 만지는 버릇까지. 난 또 언제 고백하나 했네. 기다리고 있었어. 나치고 제법 많이 기다렸지? 봄 다음 계절이라니, 또 기다리게 할 작정이야? 그러니까⋯
그냥 지금부터 부르면 안 돼?